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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4-05 16:40
"고문 경찰관들은 아직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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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musicologist
조회 : 6,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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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10405143… [2436] |
* 심금을 울리네요: "목숨 바쳐 대한민국에 충성한 죄로 핍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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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 입력 2011.04.05 14:39 |
[부산CBS 장규석 기자]
1981년 8월 2일 오후 부산 금정구 구서동 도로변
"고호석 씨지요?"
대답도 하기 전에 건장한 남자 두 명이 고호석(당시 25세) 씨의 양쪽 팔을 붙들었다. 남자 3명은 다짜고짜 그를 택시에 태우고 눈가리개를 씌웠다.
1981년 8월 2일 오후 부산 금정구 구서동의 한 대로변에서 교사이던 고 씨는 부산시경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전두환 신군부시절 부산 최대 용공(容共)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의 시작이었다.
고 씨가 도착한 곳은 '내외문화사'였다. 대공분실을 위장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그곳의 대공수사관들도 자기들끼리 전무, 상무, 또는 부장 등의 직책으로 부르고 있었다.
"오래 기다려야 됩니까?" 내외문화사 사무실에서 잔뜩 긴장한 고 씨가 조심스럽게 남자들에게 물었다.
"역시 두목급이라 간이 크구만!" 영문 모를 말과 함께 구타가 시작됐다.
고 씨는 정신없이 얻어맞고 난 뒤 지하에 있는 조사실로 끌려갔다. 대여섯 평 남짓한 조사실에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자 두 개, 그리고 간이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 벽은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자마자 다시 가차 없이 매타작이 시작됐다.
이어 수사관이 종이와 펜을 던져줬다. "네 일생을 전부 다 써내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시가 내려왔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게 매일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처음에 "일생을 모두 적어내라"던 수사관들이 "특정일에 있었던 일을 적어내라", "몇 월 며칠 몇 시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적어내라"는 식으로 주문을 해왔다. 그 속에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없으면 다시 고문이 시작됐고 원하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같은 일이 반복됐다.
고 씨가 자술서를 쓰고 있노라면 옆방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잠을 잘 때도 숙직 수사관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욕설을 하고 때렸다. 다음날 눈뜨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극도의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고 씨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문은 '통닭구이'였다. 손을 깍지 낀 채 무릎 아래로 집어넣고 그 사이로 막대기를 통과시킨 다음 거꾸로 매달아서 경찰봉으로 마구 때린다. 팔이나 다리로 막을 방법이 없이 온 몸으로 고스란히 매타작을 견뎌야 한다. 이 고문을 받던 도중 고 씨의 엄지 발톱이 떨어져 나갔고, 발가락이 짓물러져 썩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내던진지 오래였다. 이미 각본은 경찰의 손에 들려있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 씨는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있었다. 고 씨는 경찰이 갖고 있는 반국가단체 조직도에서 서열 2위에 이름이 올라있었다.
하지만 잡혀온 사람들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다. 사실 잡혀온 사람 가운데는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경찰은 고 씨에게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는 씌우지 못하고 이적 표현물을 소지.학습하고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했다. 다방에서 두 명이 만나 나눈 얘기는 국가전복을 모의한 집회로 탈바꿈했다.
영장이 떨어지고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된 날이 그 해 9월 7일이었다. 고 씨는 8월 2일 체포된 날부터 36일 동안 구속영장도 없이 감금돼 고문을 당했다. 체포 사실도 가족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느 피해자의 가족들은 혹시 죽은 것이 아닌가 싶어 영도다리 인근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경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집 안을 압수수색하자 그제야 경찰에 연행된 사실을 알게 됐다.
고호석 씨 등 1차로 연행된 8명을 시작으로 이듬해 4월까지 모두 22명이 부림사건 연루자로 연행돼 최장 60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전원 국가보안법 위반, 집시법 위반, 계엄법 위반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 이상은 고호석 씨의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임)
◈ 30년 후…2011년 4월 5일 오전 10시 부산지방검찰청.
고호석(55) 씨가 부림사건 피해자 13명과 함께 5일 오전 부산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당시 고 씨 등을 고문했던 부산시경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들에 대한 고소장이다.
피해자들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대공분실 '전무' 이 모 씨와 '상무' 이 모 씨, 2명이 피고소인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고문을 가했던 '부장' 송 모 씨는 사망해 고소인 명단에서 제외됐다. 부림사건이 발생한지 꼭 30년 만이다.
고 씨는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공소시효(10년)가 만료된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사실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비록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고문 경찰관들이 반성과 참회를 하는 계기가 된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고소장에 "고문 경찰관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은커녕 국가기관으로 당당한 직무수행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고, 당시 수사검사 중 한 명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며 "과거의 잘못된 관행이 청산되지 않으면 공권력에 의한 폭력행위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썼다.
피해자들은 검찰 수사결과 고문사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지면 이를 토대로 형사사건의 재심을 청구한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고소장을 제출한 고소인 14명 가운데는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이 많다. 이호철(전 청와대 민정수석) 씨, 김재규(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씨, 설동일(전 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처장) 씨 등이 눈에 띈다.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도 당시 부림사건의 변호인이었으니, 부림사건은 참여정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고 씨는 "참여정부 인사들이 많아, 혹시라도 기득권을 이용한다는 지적을 받을까봐 그때는 못하고 이제야 고소장을 제출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피고소인들이 지금이라도 고문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고소를 취하할 생각도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버렸고 해당 경찰관들도 퇴직한 상태다. 게다가 피고소인 가운데 한 명은 지난 2009년 9월 모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목숨 바쳐 대한민국에 충성한 죄로 핍박을 받고 있다'는 입장을 나타낸 바 있다.
고소를 접수한 검찰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
hahoi@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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