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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20 23:00
글쓴이 :
musicologist
조회 : 6,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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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te.com/view/20110319n10486?mid=n0403 [2294] |
* 여러 모로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나'도, 동료 '유학생 여러분'도 아마 자유롭지 못한 구석이
많지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 본문 중에 "ssib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ssib"자가 게시판 금칙어군요(헐... ). 그래서 할 수 없이
"ssib"으로 대체합니다(다시 한 번,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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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이한우의 聽談] 학생은 얼빠지고 교수는 유아독존…"서울대, 영혼을 잃었나"
조선일보 원문 기사전송 2011-03-20 14:30 최종수정 2011-03-20 15:00
'W이론' 이면우 교수의 '한국 교육·한국 사회 뒤집기'
"우리 사회에 지진 일으킬 '活단층' 있다면 그건 기득권층"
"교수는 논문 건수만, 학생은 학점만, 총장은 글로벌 랭킹만 쳐다봐…
지금 대학은 이기적 기득권층만 양산…
사법연수원생들 떼쓰는 것 한번 봐라 싹수가 노랗지 않은가"
1990 년대 초 대한민국은 거대한 정신혁명을 경험한다. 기폭제는 1991년 서울공대 백서 폭로, 이어 92년 백서 작성의 주역 이면우 교수가 '신바람'을 주창한 'W이론을 만들자'를 펴내 50만부 이상이 팔렸고 93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을 주창하는 프랑크푸르트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95년 3월 조선일보와 이어령 교수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고 선언했다. 그 정신혁명의 선도자 이면우(李冕雨·65)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지난주 41년을 지켜온 서울대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어령이 '인문학의 앨빈 토플러'라면 그는 '이공계의 토플러'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거침없는 화법과 달변 그리고 시대에 대한 진단과 문제의식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웠고 고민도 깊었다. "그동안 외형은 나아진 듯한데 스피릿(spirit·魂)은 죽었어.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대도 마찬가지야." 서울대 엔지니어하우스에서 만난 이 교수는 아직 인터뷰 시작도 안 했는데 커피잔을 들자마자 걱정부터 쏟아냈다.
◆"인재(人災)는 분란을, 천재(天災)는 단합을 가져온다."
―일본의 비극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人災)는 분란을 가져오고 천재(天災)는 단합을 가져온다. 이번 일본 비극에는 이 두 가지가 다 있다. 천재는 지진과 쓰나미이고 인재는 원자로 연쇄 폭발이다. 지진과 쓰나미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숙적(宿敵) 감정마저 녹여내고 있다. 반면 원자로 폭발은 일본 내부에서도 이미 논란이 되고 있고 결국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의 안전 논란으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공학도로서 이번 일본의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 우리는 일본이 이같은 공포와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배워야 할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일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우리가 어떤 수준의 모습을 보이게 될지는 다 아는 것 아닌가? 그것을 생각하면 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나는 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활(活)단층의 작용을 보면서 우리 사회 내부를 생각했다. 땅속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단층이 있고 그 중에서도 사회의 근본을 뒤흔들 수 있는 활단층, 즉 단층화를 주도해 급기야 지진을 일으키는 단층이 있다고 본다. 이 사회 기득권층이다. 사법연수원생들 떼쓰는 것 봐라. 싹수가 노랗다."
―그게 무슨 소린가?
"1997년 IMF 금융위기는 엉뚱하게도 이공계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잘린 사람들이 바로 엔지니어들이다. 그때부터 엔지니어 출신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이공계 공부해봤자 밥 굶는다며 아이들을 고소득 전문직으로 몰아세웠다. 서울 공대 학생 중 100명 이상이 해마다 사법고시에 응시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고소득 전문직의 관심 범위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넘어서지 않는다. 단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안전한 대기업에 일부 들어가고 나머지는 동네에서 구멍가게 하다가 대형마트 들어선다는 소식 들리면 주먹 쥐고 데모에 앞장선다. 우리 사회에 3개의 단층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면 서울 공대 교수는 기득권층 아닌가?
"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기득권층의 범위는 훨씬 크다. 지금 우리 교육제도가 이기적인 기득권층을 양산해내고 있다. 고등학생 부모들, 교육제도가 어쩌니 하며 불만인 듯하지만 결코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아이들이 볼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기 아이 대학 들어가고 나면 입 싹 씻어버린다. 그러면 그 과제는 고스란히 중학생과 그 학부모들에게 옮겨간다.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교육당국도 이제 학생과 학부모 다루는 데 도가 텄다. 해마다 입시제도 바꾼다 해도 누구 하나 제대로 대들 수가 없다. 그때마다 '고기 냄새나는 걸레'(새 입시제도) 하나 던져주면 서로 뜯어먹으려고 난리피우다가 결국 당국의 손에 놀아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공대에 할당된 '얼(spirit) 빠진 학생' 4년 학점 관리해서 내보내면 나 같은 공대 교수의 '임무'는 끝이다."
―사회 위기, 교육 위기, 이공계 위기를 말하는 건가?
" 그렇다. 총장은 글로벌 랭킹 높이기에, 교수는 논문 발표 '건수'에, 학생은 학점과 '스펙' 관리에 정신이 없다. 정작 대학에 교육이 없고 배우고 가르치려는 혼이 빠져 있다. 위기가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조만간 공동체 붕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자연의 쓰나미는 공동체 의식이라도 강화시키지만, 사회의 단층화로 인한 인공 '쓰나미'는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사회과학 공부한 교수들 뭐하나?"
◆"대학생 때 공부 빼곤 다 해봐서 공부하러 대학원 갔다."
―너무 무겁다. 가벼운 이야기 좀 하자. 튄다. 원래 그랬나?
" 행동? 아니면 복장? 좋아, 행동부터 말하지. 어려서부터 운동 좋아했고 화가가 되고 싶어 미대 가려 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미술부 선배란 놈들이 하도 패서 그만뒀다. 빙상반과 스키반으로 옮겨다녔다. 경기고등학교 다녔는데 반에서 중간쯤 했다. 그래도 반에서 50명까지는 서울대 이름 붙은 과에는 가던 시절이라 당시 잘나가던 섬유공학과 무난히 합격했다. 대학 시절이 좀 엉망이었지. 이 부장은 충무로 '신상사파'라고 들어봤나? 당대 최대의 조폭. 걔들하고 어울려 좀 놀았고 흥신소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그때 세상이 배신과 배반으로 돌아간다는 걸 봤지. 학점이야 당연히 C, D, FFF…. 그것 때문에 대학원 갈 때나 교수 임용될 때 고생 좀 했지."
―멋쟁이다. 지금 넥타이도 만만치 않은데.
"일부러 멋을 부리는 건 절대 아니고. 내가 색감이 좀 있거든. 그래서 내가 맘에 드는 옷이나 넥타이는 남 눈치 안보지. 하긴 대학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장발 고집하고 그때 벌써 (오른쪽 팔을 내밀며) 이거(팔찌) 하고 다닌 데다가 구두는 이태리제를 신었으니 튀긴 했지. 교수 임용 당시 '선비' 교수님들이 '저 망둥이 하나가 서울대 교수의 권위를 무너뜨린다'고 걱정들이 많았지.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한테 조금 미안하긴 한데. 뭐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먹은걸."
―교수를 목표로 대학원에 간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그냥 간 거다. 그동안 안한 공부란 게 뭔지 좀 알아보려고. 그러나 교수를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 사실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게 말이 되냐, 좋아서 해야지. 그때 꿈은 섬유 오퍼상이었다. 어느날 오퍼상 하는 선배 사무실에 놀러 갔는데 어딘가 전화 한 통화 하더니 1년 먹을거리는 챙겼다고 하는 거야. 순간 저거다, 가장 적은 노력으로 큰돈을 벌 수 있겠구나. 섬유야 내 전공이잖아.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어 구색 갖추기 차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게 쉽지 않은 거야. 오기가 발동했지. 일단 공부를 만족할 수준까지는 해보고 그만두자고. 그래서 유학갔지."
―유학을 두번 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미국 미시간대에서 인간공학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군미필 유학생을 다 불러들였어. 난 아버지가 돌아가신 데다 2대독자였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는데도 귀국하라는 거야. 13명 중에서 2명만 합격한 박사 과정 시험도 통과해놓고 얼결에 불려들어와 방위까지 마쳤다. 그 무렵 서울대에서 산업공학과를 만든다고 커리큘럼을 짜달라는 요청을 받아 1970년 스물다섯에 최연소 서울대 교수가 됐지. 그런데 학위에 대한 미련이 남아 후배 교수 들어올 때까지 5년간 기다렸다가 다시 나가서 과정 공부 처음부터 반복하고 1979년에 학위 받고 돌아왔어. 미시간에 남으라는데 미국이 싫더라고."
―명강의에 실력 있는 교수로 명성이 자자했다던데.
"운이 좋았던 거지. 사실 교수로서 열정은 별로였지만 최소한의 의무는 해야 하니까 열심히 가르쳤지. 젊기도 했고 새로운 이론을 제대로 공부해온 덕도 있었고."
―서울대 교수가 전국 육체미대회에 출전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 그게 어어 하다가 그렇게까지 된 건데. 마흔쯤 되니 배도 나오고 해서 운동을 해야겠더라고. 골프는 시간이 많이 들고 테니스는 짝을 맞춰야 하니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강남의 한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 삼아 한 게 보디빌딩인데. 마침내 박사 논문이 근육피로현상을 수학 모델로 설명한 것이라 근육에 대해 좀 알았지. 좋은 코치를 만나기도 했고. 요즘 '몸짱' 연예인들 王(왕)자는 그때 나한데 비길 게 못돼. 나는 王자 사이에 근육의 주름과 결까지 생생했으니까. 그러다가 88년쯤인가 코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동네 대회에 이어 전국대회에까지 나갔는데 덜컥 장년부 1등을 했지. 아마도 육체미에 대해 무식한 운동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려 교수인 나를 내보냈는데 그렇게 된 거지. 아, 그랬더니 동남아대회에도 나가라네, 그런데 그 정도 하려면 교수직 내놓고 직업 바꿔야 돼. 그래서 동남아대회는 접었지."
◆ '서울공대 백서'와 'W이론' 발표로 유명세를 타다
―1992년 여름 펴낸 책 'W이론을 만들자'를 빼놓고 이면우 교수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보다 1년 전인 1991년 서울 공대 백서와 W이론은 돌이켜보면 짝을 이룬다. 백서는 서울 공대의 비참한 실상을 고발한 것이고 W이론은 범위를 조금 넓혀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짚어본 것이다."
―그 시절에 백서를 내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 당시 공대학장이 백서 발간을 제의해 6명의 교수가 선정이 돼 실태 조사를 했다. 한심했다. 공대 예산의 86%가 교직원 인건비로 나가고 있었다. 그걸로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실험기자재도 폐품에 가까운 미국과 일본의 한물간 기자재들이 전부였다. 그나마 들여와도 '촉수불가(觸手不可)'였다. 교수가 멀리 서서 저 기계는 이러저러한 것, 저 기자재는 이러저러할 때 쓰면 되는 것이라고 하면 끝이었다. 한강의 기적이니 아시아의 4마리 용이니 하며 들떠 있을 때 서울 공대 수준이 그랬다. 이대로 깔 것인가 내용을 완화해야 할 것인가로 6명의 백서위원이 3대3으로 갈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데서는 매파가 이기지만 대학에서는 비둘기파가 이긴다. 마지막에는 나 혼자 남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 내부 고발을 하기로 결심하고 자료를 내 책상에 두었는데 당시 조선일보 기자가 우연히 내 방에 들렀다가 그 자료를 갖고 가서 특종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아닌가?
"즉각 '남산(안기부)'에 끌려갔다. 묻지도 않고 패는데 미치겠더라. 뭐라 물어야 거짓말이라도 하지, 그냥 '이 새끼 어디 빨아먹을 돈이 없어 늙은 과부 돈을 빼먹으려 하느냐'는 거야.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었어. 이유는 한참 있다 알았지. 당시 일본과의 무역 역조 시정을 위한 조치의 하나로 우리 정부가 일본에 첨단기술 이전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내가 백서 84쪽에서 이렇게 지적했거든. '적장에게 우리는 병력이 없으니 우리에게 병력을 달라는 꼴과 같다. 이 어리석은 장수는 예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스피릿(spirit)도 없다.' 그걸 내 앞에 들이대며 '당신이 생각하는 어리석은 장수가 누구냐?'고 따져물어.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절대 아니라고 싹싹 빌고 나올 수 있었다."
―그걸로 끝이었나?
" 그나마 정치인들은 나라 생각 좀 하더라. 뒤에 'W이론을 만들자'가 반향을 일으키니까 청와대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뭐가 문제냐고? 그래서 돈을 달라고 했다. (창에 비치는 앞의 공학관 건물 301동과 302동을 가리키며) 저거 그때 내가 받아온 700억원으로 지은 거다. 매값치고는 좀 받았지. 그래서 콩나물 다가구주택에 살다가 연립주택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교수들의 반응이 차가웠다. 동료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연·고대나 카이스트, 포스텍 등의 교수들까지 '서울 공대가 그 정도라고 까발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며 나를 몰아세웠다. 아이들 교육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교수들이 그래서는 안 되지."
―20년이 흘렀다. 그때의 문제제기로 인해 얼마나 좋아졌나?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백서에서 'ssip을' 당시 서울대 랭킹이 400등 정도였는데 지금은 47등까지 올랐으니 많이 좋아졌다. 하드웨어가 그렇다는 말이다. 소프트웨어는 아직 멀었다."
◆"대학은 썩을 대로 썩었다."
―41년 교단에서 서울 공대생들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60 년대 선배들과 우리들은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최고의 열정으로 뭔가를 해보겠다는 흥분 상태였던 것같다. 국가와 사회 건설에 일조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70년대와 80년대 학생들은 우리만큼 고생은 안 하고 컸지만 산업의 역군이라는 정신이 있었다. 2000년대부터는 학점 관리의 도사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학생들 탓할 수도 없다. 공대 학부생 5500명 가운데 10% 이상이 고시 유혹에 흔들리고 있다. 물리학과 다니던 학생이 다시 입시를 봐서 서울 의대에 입학한다. 고시 공부를 하고 있는 자연대와 공대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돈 잘버는 변호사 의사 한의사 되겠다고 작심한 아이들에 비하면 미련한 '최후의 변절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딱해보이기도 한다. 눈치 빠르게 진작 돈 버는 쪽으로 갈 것이지 서울 공대는 왜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서울음대 문제로 시끄럽다. 공대라고 예외는 아닐 텐데. 이런 문제는 일회성인가 구조적인가?
" 난 구조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교수란 어떤 사람인가? 어려서부터 공부 잘했고 최단거리로 공부해서 교수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 그 어떤 갑(甲)을(乙)관계도 교수와 학생만큼 종속적이지는 않을 거다. 제자 인생의 목줄을 쥔 사람들이 교수다. 학부모들이 아무리 힘이 세도 자식 앞날 때문에 교수 앞에서는 숨을 죽인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는 감사도 없고 지적사항도 없고 규제도 없다. 이렇게 20년쯤 교수 하고 나면 유아독존이다. 게다가 교수 사회는 옆 동료 상관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내가 이 동네(교수사회) 있어본 경험으로는 이런 문제 일으키는 교수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 마비상태다. 자정능력이 전혀 없다.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도 잘못이다. 교수가 때려 맞았다. 그런데 왜 가만 있나? 앞으로 잘 풀려보려고 그러는 거다. 어쩌다 교수의 비리를 고발하는 '돌출'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은 적어도 그쪽 동네에서는 두고두고 매장된다. 그래서 우리도 미국처럼 '대학윤리위원회'설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존경받는 교수들이 중심이 돼 있고 여기에는 교수가 학생을, 학생이 교수를, 교수가 동료교수를 기탄없이 고발할 수 있고 보안이 유지된다. 다만 우리 대학들에 그런 존경받는 교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서울대가 이 정도라면 다른 대학들, 혹은 사회전반에 부패와 리더십 부재가 만연해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세상 떠나고 나니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지도자가 없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다. 김동길 교수가 정치에 몸을 담그지 않고 한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쯤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김용옥씨는 처음에는 주목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시류에 영합하고 매스컴에 충성(?)하다가 망가져버렸다. 한 사회의 지도자란 창의적인 생각을 갖고서 고행도 감내하고 주변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만드는 사람이다. 권력과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한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동네(서울대)에는 그런 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이 들어오질 않는다. 경제논리로 무장한 학생들, 부모의 투자를 받았으니 반드시 고소득 전문직이나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상환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춘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에게 롤모델로 제시하는 인물들은 누군가?
"간디, 호찌민, 체 게바라, 백남준, 마틴 루터 킹 등이다.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정신적 지도자들이다. 내가 강조하는 창의성과 리더십을 한몸에 갖춘 인물들이니까."
―자녀들 교육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2 남1녀인데 큰아들은 록밴드를 하는 작곡가다. 작은아들은 여기(서울공대) 나와서 지금은 미국에서 뮤직테크놀로지 공부하고 있다. 모바일폰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미고 아이폰으로 심포니를 만들고. 딸애는 가야금 했는데 지금은 주부로 잘 살고 있다. 아이들 키울 때 자기들 의견 존중해주고 자유방임으로 키웠다."
―왜 학과 창설교수가 명예교수는 사양했나?
"지난번 정년기념식장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거든 관악의 하늘을 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관악의 하늘을 보았더니 다음 세 가지가 보였다. 첫째 대학은 글로벌 랭킹에만 눈이 멀었고 교수는 SCI(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에만 온 신경이 가 있고 학생들은 학점관리에만 혈안이 돼 있구나.' 이런 동네에서 무슨 미련이 있어 명예교수까지 하겠나. 41년이면 족하다. 지난주부터 울산과기대 디자인 인간공학부 석좌교수로 나가는데 느낌이 좋다. 인간공학이 원래 내 전공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그동안 '크고 오래된' 대학에 줄곧 있었는데 그 학교는 작지만 젊다. 거기서 학생들에게 혼을 불어넣어보려 한다. 첫날부터 아이들을 '짓이겨' 놓았지. '내 수업 들으면 다른 과목 2~3개는 포기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장학금 날아간다'고 겁을 줬거든.그런데도 20명 중 단 한 명도 수강신청 정정 안했더라."
인터뷰를 마친 이 교수는 공학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가 우리 사회의 정상궤도를 이탈한 괴짜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궤도에서 벗어나다 보니 정상궤도를 달려온 이 교수가 괴짜로 보이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이한우 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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