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작성일 : 12-03-20 15:11
글쓴이 :
musicologist
조회 : 6,032
|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320100318485… [2272] |
시사INLive | 남문희·김은지 기자 | 입력 2012.03.20 10:03
'탈북자들의 인권과 생명의 존엄성', '탈북자 북송 반대, 난민 지위 인정'. 양식을 가진 시민으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이라면 진보·보수를 떠나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분과 현실의 괴리가 이 문제만큼 큰 사안 또한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의 언론이, 정치인이, 그리고 인권단체가 그들의 인권과 생명에 대해 떠들면 떠들수록, 그에 정비례해 중국 땅을 떠도는 그들의 인권과 생명이 위협받게 된다는 이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현실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탈북자 문제가 제기된 1990년대 중반 이래 정부 당국이나 민간의 전문가 및 활동가, 언론인들이 숱한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최소한의 공약수 같은 것이다.
1999년 5월 탈북자 취재를 위해 옌볜조선족 자치주에서 '신경줄이 터지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으로 1주일가량을 보낸 일이 있다. 당시 만난 탈북자들은 "여기서라도 살 수 있게 제발 떠들지 좀 말아주시오"라고 애원하곤 했다.
세상이 변한 걸까. 20여 년 가까이 암묵적으로 유지돼온 '조용한 해법'이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4월 총선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터진 일련의 언론 보도를 필두로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전개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의 단식 농성 및 북한인권단체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확대된 탈북자 문제의 공론화(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북송 반대 및 난민지위 인정 요구)에 여야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이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제 조용한 외교는 죽었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라고. 그러나 정말 그럴까. '새로운 접근'은 과연 그들을 살려낼 수 있을까.
3월7일 시내 모처에서 만난 탈북자 지원 활동가 ㄱ씨는 참담함과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50대 초반인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다 투옥돼 몇 년간 고생했던 험난한 이력의 소유자이자 이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베테랑 활동가다. 그는 자신의 정치 성향을 '보수'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탈북자 문제는 진보·보수를 떠나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 지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자, 그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들이 터져나왔다.
탈북 지원 활동가의 충격 증언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은 2월8일 중국 선양의 공안국에 잡혀간 탈북자 12명이었다. 국내외 베테랑 활동가 여러 명이 달라붙어 그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막후교섭을 활발하게 펼친 결과 그중 몇 사람은 석방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언론 보도와 그 뒤 국내에서 전개된 탈북자 이슈화로 인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언론 보도는 2월13일부터 국가인권위원회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에 의해 거의 동시에 이뤄진 일련의 보도를 뜻한다. 그 뒤 2월21일 박선영 의원이 주한 중국 대사관 앞에서 단식 농성에 들어가고 여기에 '이번 사안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북한인권단체들이 합류해 시위를 벌임으로써 상황이 일파만파로 커져, 이제는 탈북자들이 정말 북송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의 석방 교섭이 실패해 북송되더라도 '단순 탈북'으로 넘겨주도록 하는 내용도 협상에 포함돼 있었는데, 이들의 신원이 언론에 노출됨에 따라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ㄱ씨의 설명에 따르면 단순 탈북은 6개월~2년 정도 노동단련대에서 생활한 뒤 귀환이 가능하지만 '남한행'으로 찍히면 정치범관리소(수용소)로 넘겨져 다시 나오기 어렵다. 그는 "사건이 공론화된 후 이들 중 무산 출신 탈북자 한 사람이 남한행으로 분류돼 신의주 보위부에서 무산 보위부로 넘겨졌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겉으로는 탈북자의 인권에 대해 떠들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인권과 생명을 짓밟았다. 4월 총선을 앞둔 시기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아니냐"라는 의구심까지 드러냈다.
막연히 '이명박 정부 들어 한·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더 이상 조용한 외교가 불가능해졌나보다'라고 생각했던 기자에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충격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막후교섭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이 어떤 이들이며 그들을 소개해줄 수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선뜻 이번 일에 자신을 포함해 "탈북자 구호 경력 10년 이상 된 활동가 여러 명이 참여했다"라고 답했다. "그동안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일부는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며 시위에 합류하기도 하고, 일부는 참담한 심경 속에 두문불출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중 2월8일 체포된 탈북자 12명을 중국 내에서 인솔했던 조직 책임자 ㄴ씨와 국내에 먼저 들어와 있던 탈북자 가족의 부탁으로 미성년자 2명의 석방 교섭을 마지막까지 벌였던 ㄷ씨를 소개했다. 이들을 통해 막후교섭 상황을 좀 더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탈북자 가이드 총책인 ㄴ씨가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2월8일 저녁 6시30분, 12명 탈북자가 체포된 직후였다. 점선으로 연결된 중간 관리자로부터 첩보를 입수한 후, 이들의 소재 파악에 들어갔다. 그 결과 선양시 심화구 공안국에 이들이 잡혀 있다는 게 파악됐다. 탈북자 12명과 가이드 2명이었다. 선양 시내에서 이들이 잠시 체류했던 쉼터 직원 3명까지 체포돼 있었다.
탈북자 12명은 브로커로부터 소개받아 옌지·선양·무단강 등 중국 각지에서 선양으로 모여든 사람들이다. 이 중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5명, 특히 2명은 아직 젊거나 미성년자였다. 19세 여성은 부모가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자리 잡았고, 16세 소년은 부모는 이미 사망하고 형과 누나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험난한 석방 교섭의 시작
ㄴ씨에 따르면 이번에는 특히 중국 내 이동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해 가이드들이 무척 애를 먹고 속상해했다고 한다. 임신부 두 사람이 이들 일행에 합류했는데 그중 갓 탈북한 한 사람의 출산이 임박해 있었다. 중국은 산아제한 국가로 신분증이나 출생증명서가 있어야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런 것을 갖출 수 없는 처지인지라 병원에도 못 가고 해산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이날 잡히지 않았다면 버스를 타고 정저우로 갔다가 기차로 쿤밍으로 이동해, 타이 국경을 넘을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이들의 석방 교섭은 벽에 부딪혔다. 여기서도 전혀 예상 밖의 일이 작용했다. 이들이 체포되고 3~4시간이 지난 후 ㄴ씨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분명히 처음 체포된 사람은 12명이었는데 10명만 남고 2명은 중간에 석방된 것이다. 그 2명은 단둥 소재 탈북자 출신 한국인 목사로부터 소개받은 20대 남녀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돈을 주고 빠져나왔으니 다른 루트를 소개해달라는 것. 그때 ㄴ씨는 "지난 10년의 경험으로 볼 때 직감적으로 함정이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번 막후교섭에 참여한 ㄷ씨로부터 더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목사는 김요셉(가명)이라는 인물로, 자기 집에서 탈북자 보호 활동을 해오던 중 단둥 공안국에 적발된 뒤 '탈북자 보호조직을 보고해달라'는 회유공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자기가 보호하던 20대 남매를 선양에 투입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이런 일만 없었다면 막후교섭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서울의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 중앙정부는 베이징 공관에 들어오는 사람들만 신경 쓸 뿐, 지방에서 잡히는 사람들은 그 지역 공안들이 조용히 처리하도록 재량권을 준다"라고 말했다. 지역 공안이 이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인데, 이들 중 탈북자의 처지를 동정하는 사람이 많아 나름의 근거와 돈만 있으면 뒤로 사람을 빼는 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돈 액수는 사람이 많을 때는 1인당 1만~2만 위안(약 180만~350만원), 적을 때(두 사람 이하) 2만~3만 위안(약 350만~530만원)이 '공정가'라고 한다. 이렇게 공안과 쌍방 합의가 되면 1주일에서 10일간 머물 수 있는 체류증을 떼어준다. 그 안에 영사관이든 대사관이든 찾아가 이 땅을 떠나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 사건은 단둥 공안국의 첩보 제공으로 시작된 사안이라 선양 공안국이 맘대로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들의 호송을 책임졌던 ㄴ씨는 절박했다. 집을 팔아 1억(50만 위안)이라도 내놓을 테니, 10명 모두 내보내달라, 그게 아니면 최소한 미성년자 두 명이라도 보내달라고 매달렸다. 공안 쪽에서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미성년자는 어떻게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기다려달라고 했다. 체포된 다음 날인 2월9일부터 사흘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언론 보도에 분노하는 이유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이번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시간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다. 가이드들이 같이 잡혔기 때문이다. 보통 가이드 없이 붙잡히는 단순 탈북은 북송까지 3일이면 끝난다. 그러나 가이드가 잡히면 이들에 대한 형사처벌(보통 비법조직죄·비법운송죄 적용)을 위해 탈북자들이 증인 내지 증거물 구실을 해야 한다. 재판까지 15~20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즉 2월8일 체포됐기 때문에 적어도 2월23일 내지 28일까지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바로 이 점이 2월13일 오후부터 대대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국내 언론 보도에 대해 활동가들이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시간이 충분했기에 협상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 여지를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ㄴ씨는 애가 탔다. 그래서 한국 외교통상부에 선을 대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외통부 역시 큰 도움이 못 되었다. '노력하고 있으니 기다려달라. 탈북자들 소재를 파악 중이다'라는 답변만 계속 돌아왔다.
이 무렵 또 다른 활동가 ㄷ씨가 구출 노력에 합류했다. 그 역시 10여 년간 온갖 고생을 겪으며 탈북자 구조에 헌신해온 인물. 그가 라오스 당국과 '맞장'을 뜨며 탈북자들을 데려온 얘기는 이 바닥에서 유명하다. 이들이 체포됐을 당시 그는 2월11일까지 일정으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그런데 미성년자인 소년의 가족으로부터 구조 요청을 접하고 일정을 당겨 2월9일 귀국해 막후협상에 나섰다. 그는 "다른 사람들까지 구하기에는 연고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돈 문제를 감당할 수 없었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와 두 미성년자의 가족이 선양 공안국, 그리고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벌인 막후교섭은 이번 협상 과정의 정점을 이뤘다.
처음에는 그도 이번 사건의 특수성이라는 똑같은 벽에 부딪혔다. 다만 미성년자의 경우 한국에 가족이 있기 때문에 석방해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 선양 공안국이 제시한 방법은 이들에 대한 신원확인서를 선양 주재 한국 총영사관으로 보낼 테니 도장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 전에 이미 선양 공안국은 선양 주재 북한 총영사관에 신원확인서를 보냈으나 북측이 묵묵부답이어서 이들을 무국적자로 처리해둔 상태였다. 통상적으로는 이 상태에서 북송하지만, 이번 경우 한국에 있는 가족이 나타났고 비용 지불 의사도 있었기 때문에 근거만 마련되면 가급적 재량권을 이용해 석방하려 한 것이다.
그 근거가 바로 한국 총영사관의 신원 확인도장이었다. 2월9일부터 주말을 끼고 공안국과 접촉하기 시작해 이런 해법이 최종 도출된 게 2월12일 월요일이었다. 도장만 받아오면 2월14일 수요일 오전 중이라도 미성년자 두 사람은 내주겠다는 공안국의 약속도 있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외교통상부와 접촉을 서둘렀다.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난 뒤 한 외통부 당국자가 언론에 이런 얘기를 했다. "1990년대 말 탈북자가 생기기 시작한 이후 (중국과) 양자 협의를 통해 1만명 이상의 탈북자를 국내로 데려오는 성과가 있었지만 2009년 이후 양자 협의 효력이 예전 같지 않아 새로운 요소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하게 됐다." 이 말은 탈북 문제에 대한 조용한 해법을 끝내고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아우성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됐던 2월8일 사건에는 이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은 것은 한국 외교통상부였다는 게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외교통상부도 이들을 외면
중국 공안이 보내온 신원확인서에 도장만 찍어줬다면 두 사람은 쉽게 석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탈북자 가족들이 외통부 동북아 2과를 찾아간 것은 2월13일 오전. 사정을 설명했으나 곧 강고한 벽에 부딪혔다. '그들은 북한 사람인데,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신원확인서에 도장을 찍어주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변철환 외통부 동북아 2과장은 "나는 도장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한 탈북자의 가족인 강 아무개씨는 "나와 아내가 변 과장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으나 거부당했다"라고 재차 확인했다.
외통부와의 1차 접촉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더 남아 있었다. 원래 선양 공안 측과 얘기한 해법에는 한국 총영사관의 도장을 받아오는 게 1안이었고, 도장을 못 받을 경우에 대비한 2안이 있었다. 1안의 경우 한국인 신분이 인정되기 때문에 불법체류에 따른 벌금(1인당 5000위안)이 경감되고 뒷돈만 내면 됐다. 그러나 이게 난관에 봉착한 상태이므로, 뒷돈에 벌금까지 추가하는 2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가족들 처지에서야 당연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날(2월13일) 오후 일이 터졌다. 이런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 하는데 그만 언론에 보도되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국가인권위원회와 박선영 의원을 소스로 해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활동가 ㄷ씨와 별도로 이들의 석방 교섭을 벌여온 ㄴ씨는 선양 공안국의 말대로 2월13일까지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진전이 되지 않아 '초조하고 답답했다'고 한다. 외교통상부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말로만 그칠 뿐, 그가 보기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통부에 압력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인권단체와 상의해 두 가지 경로를 택했다. 하나가 인권위원회이고 또 하나가 박선영 의원이었다. 2월13일 오전 '탈북자 긴급 구출을 위해 지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작성해 두 군데에 전달했다. 인권위에는 먼저 통화를 하고 팩스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 내용이 자신들의 허락 없이 언론에 보도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2월13일 오후부터 인권위발로 기사가 뜨기 시작했고, 거의 동시에 박선영 의원도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 24명이 북한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해 있다"라며 언론에 전격 공개했다. 이때부터 그는 패닉에 빠졌다.
내일이면 돈을 더 줘서라도 딸과 동생을 만나리라 꿈에 부풀었던 남쪽의 가족들과 활동가 ㄷ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당장 선양 공안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당신들이 약속을 깼다. 언론에 보도됐기 때문에 이제 확인서 없이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2월15일 외통부에 다시 찾아갔다. 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심지어는 "정 살릴 수 없으면 면회만이라고 시켜달라. 어차피 돌아가면 죽을 목숨, 독약을 먹여서라도 송환만은 막겠다"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검토해보겠다, 기다려달라,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뿐이었다. ㄷ씨는 "그 뒤로도 외통부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지 모를 정도로 찾아가서 사정했다"라고 말했다.
북한 측의 공문 도착, 그걸로 끝
그런 와중에 상황은 점점 확대됐다. 일단 공론화가 시작되자 언론 보도가 뒤를 이었다. 박선영 의원이 뉴스의 한 축이었다. 심지어 가족들이 박 의원 측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진작 이래야 했다. 이제라도 국제사회로 끌고 가야 한다'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2월21일부터 시작된 박 의원의 단식 농성, 여기에 차인표 등 연예인들의 동참, '진보 세력은 뭐 하냐'는 보수 언론의 비아냥과 민주당 및 일부 진보 인사들의 동참, 드디어 2월24일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탈북자 북송 반대 결의안 통과.
협상은 이제 종착점을 향해 다가갔다. 이 문제가 제기된 이후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켜온 북한이 2월25일 운을 뗐다. 조평통 산하 '우리민족끼리'라는 웹사이트와 조선적십자사 총재가 방송에 출연하는 형식이었다. 한마디로 '북한 사람을 남한 사람이라고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투다. 거의 동시에 선양 공안국으로 선양의 북한 총영사관 공문이 도착했다. (현재 공안국에 체포돼 있는 사람들은) 북한 사람이라는 확인서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선양 공안국 측은 '우리 손을 떠나 이제 외교부 사안이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 뒤 더 이상의 협상은 없었다.
남문희·김은지 기자 / bulgot@sisain.co.kr
|
|
|